[Axt 서평] 작가의 테두리
『안녕, 내일 또 만나』ㅣ윌리엄 맥스웰ㅣ최용준 옮김ㅣ2015ㅣ한겨레출판
어쩌면 책 읽기는 나의 테두리를 극복해보려는 노력 같다. 내 신체와 역사와 기억과 쩨쩨한 자아로 세워진 그 테두리는 부단히 애써야 겨우 조금 넓어진다. 내가 나라는 걸 까먹을 만큼 커다란 사건 앞에서는 허물어지거나 낮아지거나 순간적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압도적인 슬픔, 압도적인 아름다움, 압도적인 탁월함 등으로 나 같은 건 잠시 안중에 없어지는 것이다. 나를 채우는 독서 말고 나를 비우는 독서도 있다. 어떤 책들은 과거의 나를 점점 줄여나가도록 돕는다. 새로운 나 혹은 새로운 존재가 되자고 등을 쓸어준다. 그래봐야 나는 영영 나고 겨우 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 이상의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잠깐이라도 다른 존재의 눈을 빌려 세계를 보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엔 이른 아침마다 책을 읽는다. 최선을 다해 사수하는 매일의 피크닉이다. 본격 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이 일과를 누려야 하루를 좋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 좋은 마음이란 내게 부과된 업무량에 괜히 억울함을 품지 않는 상태다.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 된다. 그때의 내 모습은 정말 최악이다. 그러므로 눈 뜨자마자 소풍 가는 기분으로 책이랑 노트를 챙겨서 집을 나선다. 머리는 안 감는다. 동행자는 없다. 걸어서 삼십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주로 커다란 소나무와 감나무가 보이는 카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직원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손님들이 몰려오기 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구경할 사람도 없고 엿들을 대화도 없는 이 아침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책을 읽는 것이다. 좋은 소설은 여러 번 다시 읽게 된다. 첫 번째 독서에서는 그저 놀라며 읽기만 해도 급급하다. 두 번째 독서부터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썼냐?’하고 골몰하며 읽는다. 무엇이 생략되었는지를 추측하고 이걸 써나갔을 작가의 인생을 상상한다.
어제의 나와 함께 했던 윌리엄 맥스웰의 소설 『안녕, 내일 또 만나』를 앞에 두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좋은 한 권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이만큼 많은 시선을 가진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떤 마을의 오십 년을, 인물만 바꿔가며 몇 번이나 다시 살아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제멋대로 한 사람을 상상한다. 아직 이 소설을 쓰기 전의 윌리엄 맥스웰이다. 그는 『뉴요커』의 소설 편집자로 오랫동안 일 해왔다. 동시에 과거의 어떤 부분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살아왔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그의 마음에서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안타까움이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로 파괴된” 수많은 이들이 안타까워서, 미안해서, 이해하고 싶어서, 과거를 몇 번이고 되돌려본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려는 노력, 다른 사람이 되어서 그의 시선으로 이 일을 보려는 노력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 같다.
그렇게 시작된 시선의 이동은 크고 작게 연결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닿는다. 실은 사람 뿐 아니라 개와 말과 양에게까지도 닿는다. 이 독서에서 몹시 놀랐던 점 중 하나다. 시선이 닿는 정도가 아니라 개가 되어서 쓰고 양이 되어서 쓴다. 어설픈 의인화 없이, 최대한 그 존재가 되어서 쓴다. 그게 불가능하단 걸 우리도 알고 그도 안다. 맥스웰도 영영 맥스웰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그는 맥스웰 이상이다. 온사방으로 확장된 존재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앤 패칫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핵심은 하나뿐인 이야기를 내어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으려 싸우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데 있다”고. 맥스웰은 만나보지 못한 등장인물이 되어서 그의 시선으로 본 세계를 상상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저 인물에서 이 개로, 이 개에서 저 양으로, 저 양에서 이 밭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는 이유는 어떤 사건을 총체적으로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낱낱이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하나의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어떤 모습으로 파괴되었는지를, 회복 가능한 부분은 어디이고 도저히 불가능한 부분은 어디인지를 드러낸다. 그러려면 이 사건을 다각도에서 봐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맥스웰은 여러 인물의 자리에서 서야만 했던 것 같다.
이 소설로써 오래 전의 잘못을 사과하고 싶었다고 그는 적었다. 그 언급은 짧지만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미안함이 전해진다. 과거의 사건이 작가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닳고 닳도록 굴려졌을지 느껴진다. 어느 순간엔 자기 안의 “이야기꾼이 나서서 상황을 재배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관한 한 우리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 적혀있던 제임스 설터의 말을 생각한다. 그는 소설가 셀린의 이야기를 이렇게 인용한다. 공짜로는 얻을 수 없다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그 이야기를 변형할 권리가 생긴다고. 맥스웰이 자신의 경험을 변형하여 소설로 완성하기까지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무척 괴로웠을 거라는 것만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두 번째 독서에서 보이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독서에서는 이 소설의 아름다움에 놀라느라 바빴다. 또한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세계를 보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성공한 결과를 따라가느라 바빴다. 그러느라 나는 나를 까먹으며 읽었다. 작가의 테두리가 저 들판 너머까지 멀리 멀리 확장되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내가 도달하지 못한 테두리였다.
글 : 이슬아
(1992~) 연재 노동자. 비건 지향인. 생활 체육인. 헤엄 출판사 대표. ‘일간 이슬아’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