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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나



일러스트 손은경 @thanksforbeingu


“남의 슬픔이 나의 슬픔처럼 느껴질 때 작가의 글쓰기는 겨우 확장된다” 라고 스승은 말했다. 나밖에 모르는 데다가 심지어 가끔은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내가 어떻게 확장된 글을 쓸 수 있을까. 모르겠기에 처음에는 자신에게 머무르는 글만을 썼다. 글 속에 주로 등장하는 사람은 과슬이(과거의 슬아)와 미슬이(미래의 슬아)였다. 현재란 끊임없이 지나가버려서 손에 쥘 수가 없으니 현슬이는 가끔씩만 등장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자신에 관해 아주 많이 쓴 결과, 내 얘기가 몹시 지겨워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설레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타인들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혼자 알기 아까운 주변의 일화와 장면과 대사를 기록했다가 편집하고 가공하여 글 속으로 데려왔다. 놀라운 타인들, 슬픈 타인들, 우스운 타인들, 아픈 타인들, 사랑하는 타인들을. 많이 사랑해서 열심히 애써도 그들에게 정확히 도달한 글은 한 번도 못 썼다. 완벽한 이해란 유니콘과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 타인에 관해 잘 쓴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어째서 필연적인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지 매번 다시 배웠다. 그런 날이면 내가 영영 나라는 사실이 답답해져서 남들이 쓴 책을 필사적으로 꺼내 읽게 되었다. 어느 책에서 롤랑 바르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타인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구조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구조 활동이란 무엇일까. 영영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이해해보기 위해 애쓰는 일일지도 몰랐다. 당신에 관해 틀리지 않은 문장을 쓰기 위해 가능한 한 섬세해지는 것, 성실하고 예리하게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 당신이 직접 말하지 않아서 비어 있는 이야기도 조심스레 가늠해보는 것.  “우리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이기도 하다”라고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썼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이 한 이야기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정혜윤은 썼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내가 쓴 이야기가 나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렇다면 나는 더 잘해보고 싶었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지 어디로 유통할지 더 고민해보고 싶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소중할수록 어떤 문장을 쓸지보다도 어떤 문장을 쓰지 말아야 할지를 골똘히 생각하며 쓰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쓴 글을 나의 독자들이 읽는다. 자정 즈음에 수신되자마자 바로 읽는 사람도 있지만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읽는 사람이 가장 많다. 한 달간 모았다가 프린트해서 읽는 사람도 있다. 어떤 날에는 반응이 뜨겁고 어떤 날에는 차갑다. 재미없다는 피드백이 곧바로 날아오기도 한다. 구독자 중 일부는 내 글의 오류와 문제점들을 꼼꼼히 지적한다. 나에게 필요한 비평들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글을 쓸 때 곰곰이 떠올리곤 한다. 같은 실수를 또 하고 싶지 않아서. 한편 글과 상관없는 말들도 메일함에 쌓인다. 외모에 관한 평가나 ‘브라자’를 안 하고 다닌다는 점에 관한 조롱들이다. 그런 문장들은 금방 잊어버린다. 하찮은 이야기가 나를 함부로 바꿔놔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보낸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글을 답장으로 보내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은 내 글을 읽고 자신 역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고 자주 말했다. 그 모든 피드백에 일일이 답장을 적는 대신 그저 감사해하며 매일의 원고를 썼다. 피드백이 나의 메일함에만 쌓이는 건 다행이었다. 호평도 혹평도 나만 볼 수 있으니 공개적인 장소에 댓글이 쌓이는 것보다 안심스러웠다. 보이지 않는 독자들의 품에서 자라고 있는 기분이 간혹 든다. 월 1만 원씩 구독료를 선불로 내고 내 글을 읽어주는 이들. 내가 변하거나 안 변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이들. 돈도 주고 칭찬도 주고 비난도 주는 이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들. 진짜로 의지할 수는 없는 이들.  아무도 내 글을 대신 써줄 수 없고 이것은 너무도 혼자의 일이다. 독자가 건네는 말에 쉽게 행복해지거나 쉽게 불행해지지 않도록 나는 더 튼튼해지고 싶다. 나약하지 않아야 자신에게 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휘청거리면서도 좋은 균형 감각으로 중심을 찾으며 남과 나 사이를 오래 걷고 싶다. (2018.07)


월간 <채널예스> 2018년 8월호


글 : 이슬아

그림 : 손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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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sullal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