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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의 나라



남자애가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며 묻는다.

“도쿄로 할까?”

여자애가 슬쩍 보고 대답한다.

“아니, 파리나 런던이 나아.”

남자애는 스마트폰에 손을 대고 다른 필터 버튼을 누른다. 여자애 말대로 런던 필터를 적용해보니 확실히 더 잘 생겨보인다. 핑크 톤이 섞인 도쿄 필터에 비하면 훨씬 기품 있달까. 런던 필터의 고급스러운 고동색 톤과 진한 그림자가 그의 얼굴선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고작 1달러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진 보정 어플은 고마운 제품이다. 남자애는 잠깐 고심하다가 여자애한테 묻는다.

“어떡하지? 베스트가 세 장인데… 세 장 다 올릴까?”

여자애는 단호하다.

“그럼 과해. 한 장만 딱 올려.”

아쉽지만 이런 일에 관해서는 그녀의 안목과 판단을 신뢰하므로 그는 딱 한 장만 업로드하기로 한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눈을 내리깐 남자애의 얼굴을, 여자애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반한 이목구비다. 하지만 턱뼈가 가늘지 않은 편이라 사진을 잘못 찍을 경우 넓적해 보이기 십상인 얼굴이기도 하다.

여자애는 남자애의 얼굴이 가장 날렵해 보이는 각도를 안다. 그를 오랫동안 찍어왔기 때문이다. 남자애가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때면 찍어달라는 요청이 없어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아이폰을 들곤 한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다. 그는 평소처럼 행동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잘 생긴 컷을 충분히 건질 수 있도록 조금 천천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녀는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들을 카톡이나 에어드랍을 통해 그에게 전송한다. 헤비 인스타그래머인 남자애의 피드에는 그의 얼굴과 유머가 보기 좋게 아카이빙되어 있다.

여자애는 그만큼 활발히 인스타그램을 이용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쯤 단골 카페의 모서리나 고양이의 발바닥이나 커피 잔의 모양을 찍어 올리는 정도다. 각각 다른 오브제지만 매우 일관된 톤으로 그녀의 계정에 배치되어있다. 그곳은 각자의 미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소다. 여자애의 촬영과 조언을 반영하고 나서부터 남자애의 팔로워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런던 필터를 끼얹은 사진을 방금 전에 업로드 한 남자애가 그제야 여자애의 얼굴을 본다. 둘 사이에는 찬 커피 한잔과 뜨신 커피 한 잔이 놓여있다. 그는 여자애의 근황을 묻는다.

“그래서, 그 형이랑 뭐 어떻게 됐다고?”

여자애는 대답을 시작한다.

“카톡 답장을 너무 성의 없이 하는 거야. 나도 굳이 애쓰지는 않기로 했어.”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애의 시선은 금세 스마트폰 화면으로 옮겨진다. 누군가가 그의 사진을 좋아한다고, 또 다른 누군가들도 그의 사진을 좋아한다고, 자꾸 자꾸 알림이 업데이트 되고 있다.

“듣고 있어?”

여자애가 묻자 남자애가 대답한다.

“어. 한 마디로 별 진전이 없다는 거잖아.”

남자애는 멀티 플레이에 능한 편이다. 그가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주로 자기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날이라는 걸 그녀는 안다. 그녀에겐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흔쾌히 그를 보러 나온다. 별 생색도 유난도 없이 그의 랜선 자아를 꾸며줄 적임자인 셈이다. 현재 남자애의 몸뚱아리는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어느 카페에 자리한 채 여자애를 바라보고 있으나 동시에 그의 자아는 인스타그램에서 무한 복제되며 확장되어 간다. 도쿄나 파리나 런던까지는 확장되지 못해도 그의 이미지는 한국의 불특정 다수에게 널리 전달되는 중이다. 그 사이 각자의 찬 커피와 뜨신 커피는 점점 비슷하게 미지근해진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남자애와 여자애는 애매한 온도의 수다를 몇 차례 주고받은 뒤 각자의 반지하 월셋집으로 돌아간다. 매달 집세를 내기에도 빠듯하므로 여행 계획은 아직 없다.


<유어서울> 2018년 10월호 중에서


글 :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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