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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에 관하여



너무 아프거나 슬플 땐 망설임 없이 일을 쉬고 싶다. 갑자기 일을 멈춰도 큰일 나지 않는 삶을 상상한다. 도저히 힘을 내기 어려우면 얼마간 노동을 하지 않아도 괜찮도록 말이다. 아직 그런 삶은 도래하지 않았고,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웬만해선 멈추지 않고 일해온 나의 일상도 이변 없이 계속 흘러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사는 데에는 비용이 드니까. 매월 집세를 내는 경우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 나에게 장래 희망을 묻는다면 월세 탈출이라고 대답하겠다. 월셋집 말고 전셋집에 산다면 지금보다 덜 두려운 마음으로 노동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전셋집으로 이사하려고 돈을 모으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서울의 전셋값은 말도 안 되게 비싸기 때문에 이 과정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모른다. 지금 사는 집의 보증금을 모으는 데에만 7년이 걸렸다.

조르바가 그랬다. 당신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달라고.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고. 내가 20대 내내 밥을 먹고 줄기차게 한 것은 월세 벌기, 월세 내기, 그리고 보증금 마련하기 위해 저축하기. 이런 고생을 할 수 있는 주된 원동력은 희망과 공포 같았다. 미래에는 더 좋은 집에 살 수 있다는 희망, 보증금을 더 모으지 않으면 계속 이런 집에 살게 될 거라는 공포. 혹은 월세를 제때 내지 않으면 이 집에서조차도 살 수 없다는 공포. 지난 7년간 그런 마음으로 이사를 네 번이나 했다.



첫 번째 집 : 북아현동, 8평, 반지하 투룸, 보증금 500만 원 / 월세 40만 원

스무 살 무렵 절친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둘 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본가는 지방이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우리는 코트를 입고 부동산을 여러 곳 돌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추위를 덜 타서 코트만 입고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열심히 발품 팔아 두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투룸을 찾았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 반지하 월셋집이었다. 보증금도 월세도 반반씩 나눠서 내기로 했다. 한데 친구는 보증금의 절반인 250만 원이 있었으나 나는 50만 원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지방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엄마와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어렵사리 100만 원을 보태주었다. 그런데도 100만 원이 모자랐다.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주변 어른들에게 십시일반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 작은아빠, 큰이모, 작은이모, 논술 학원 선생님, 첫사랑의 엄마 등에게 전화를 걸어 10만 원씩 부쳐달라고 했다. 이 은혜는 살면서 차차 갚겠다고 말하자 어른 10명이 별다른 말 없이 송금해주었다. 내 인생의 첫 보증금은 그렇게 마련했다. 친구와 함께 집 계약서를 쓴 뒤 사연 많은 500만 원을 집주인에게 입금했다. 돈을 빌려준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보답하는 중이다.

살아보니 문제가 많은 반지하 방이었다. 이 시절에 우리는 가난의 구체적인 모습을 공유했다. 삐뚤삐뚤한 장판, 물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바닥, 각이 맞지 않는 모서리, 청소와 환기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없어지지 않는 퀴퀴한 냄새, 변기 물에 동동 떠 있는 쥐의 사체, 드르륵 소리가 아주 크게 나는 미닫이문, 칠이 벗겨진 옥색 페인트 같은 것들. 우리는 이러한 가난의 디테일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농담으로 넘겼지만 도저히 농담이 나오지 않는 날도 왕왕 있었다. 그런 날에는 친구와 한 침대에서 껴안고 잤다.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각자의 애인과 친구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매일같이 밥을 해 먹었다. 나는 잡지사 막내 기자와 누드모델 일을 병행하며 대학을 다니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친구가 갑자기 LH에서 분양하는 전세 주택에 당첨되어 이사하는 바람에 이 동거는 1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나 혼자서 월세 40만 원을 감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집 : 온수동, 12평, 2층 투룸, 보증금 700만 원 / 월세 35만 원

친구와 동거하다가 헤어지자 살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지방에 있는 부모님 집에 반년간 얹혀살았다. 주말마다 전라남도 여수로 글쓰기 강의를 다니게 되어 고정적인 수입이 생겼고,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저축하는 금액이 늘어났다. 거기에 월세를 내지 않으니 돈이 모였다. 하지만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것이 몹시 불편해서 하루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했다. 부랴부랴 보증금을 마련하고 학교 근처에 있는 집을 알아봤다. 이번에도 100만 원이 모자랐는데 엄마가 또 어렵사리 보태주었다. 부모님에게 받은 마지막 도움이었다. 보증금 700만 원을 주고 살게 된 다세대주택의 작은 마당에는 커다란 단풍나무가 흐드러졌다. 좁고 낡은 집이지만 나름대로 정취가 있었다. 이 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글쓰기와 만화 연재를 계속하던 중 얼떨결에 웹툰 작가가 되었다. 생활비는 만화를 연재하고 글쓰기 강의를 하며 벌었다. 혼자 사는 게 생각보다 외롭고 무서워서 고양이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보내준 반찬과 식재료가 가득했다.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서 밥을 해 먹는 날이 많았다. 부엌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살림이 몸에 익기 시작했다. 


세 번째 집 : 서교동, 40평, 포룸 셰어하우스, 보증금 9000만 원 / 월세 110만 원

온수동 집의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 아는 오빠 3명이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방이 4개나 있는 집인데 가장 큰 방을 나에게 주겠다며 설득했다. 오빠들 중 한 사람이 보증금을 책임지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3명이 월세를 나눠서 내는 방식이었다. 셰어하우스가 아니라면 마포구 한복판에 있는 큰 집에 살아볼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았다. 외롭기도 하고 보증금을 안 내도 되는 넓은 집이 욕심나기도 해서 아는 오빠 3명이랑 동거를 시작했다. 화장실이 딸린 큰 방이 내 차지였고, 매달 45만 원을 월세로 냈다. 넓은 거실과 부엌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30대 초반의 오빠 3명과 동거하는 것은 웃기고 더러웠다. 이때의 생활 모습을 소재로 해서 ‘미미미마’라는 만화를 그려 연재하기도 했다. ‘미미미마’라는 제목은 심수봉이 부른 노래 ‘백만송이 장미’에 나오는 노랫말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를 줄인 것으로 장르는 시트콤이었는데 여러모로 싱거운 작품이었다. 그 만화 말고도 다른 만화 두 편을 동시에 연재 중이라 주 4회 원고 마감을 해야만 했다. 매주 네 번의 만화 마감과 글 두 편의 마감, 그리고 글쓰기 강의를 1 년간 계속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수입은 늘었으나 건강이 무척 나빠졌다. 과로로 인해 쓸개즙이 위로 역류하는 병이 생겼고, 수족냉증과 어깨 통증으로 자주 고통을 겪었다. 그래도 일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유지해야만 해서 날마다 한강 둔치에서 달리기를 했다. 그렇게 생활하며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 와중에 치아 교정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큰맘 먹고 남동생의 치아 교정비도 할부로 내주었다. 기계처럼 많은 일을 했고 그렇게 살면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번째 집 : 망원동, 16평, 2층 스리룸, 보증금 3000만 원 / 월세 45만 원

몸과 마음과 영혼을 혹사해가며 일한 결과 보증금을 더 모을 수 있었다. 아무리 외로워도 혼자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이사를 했다. 독립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자취생의 짐이라기보다는 살림집 규모의 짐이 생긴 터라 나 혼자만을 위한 집이어도 너무 좁게 느껴졌다. 방 3개가 기차 칸처럼 조르르 있는 집에 짐을 풀었다. 서재와 옷 방과 침실을 분리할 수 있었다. 나만의 보금자리를 얻고 한숨 돌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자금 대출 상환 문자가 왔다. 대출받은 학자금은 2500만 원이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다가 ‘일간 이슬아’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반년간의 연재로 대출금을 다 갚았으나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되었다. 고양이는 다섯 살이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열심히 돈을 벌고, 집세를 내고 대출금을 갚고, 책 두 권을 펴냈으나 월세 탈출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여전히 도시에 살고 싶다. 이래저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서울이 아직은 좋기 때문이다. 서울의 풍요와 활기와 편의를 언젠가는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을까? 언제 그럴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보증금을 모으며 지내고 있다.


<디렉토리 매거진> 2018년 1월호 중에서

https://directorymagazine.kr/coi-xay-gio/



이슬아

(1992~) 연재 노동자. ‘일간 이슬아’ 발행인. 수필집 《일간 이슬아 수필집》과 그림 에세이《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펴냈다. 매일 달리기와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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