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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의 선후관계


[어반라이크] 39호에 기고한 초단편소설


밤낮의 선후관계


후와 나란히 누운 밤이면 선은 이렇게 요청하곤 했다.

이야기 들려줘.

후는 있지도 않은 수염을 가다듬듯 턱을 매만지며

흠흠, 어디 보자.

라고 말했다. 등에 멨던 이야기보따리를 바닥에 잔뜩 풀어놓고는 가장 좋은 하나를 찾는 노인처럼, ‘가만있어 봐… 어디 보자.’ 하고 읊조렸다. 그러다 자신 있는 얼굴로

옛날옛날에…

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훅 꺼내는 것이었다. 선은 그 순간이 미치게 좋았다. 막상 들어보면 옛날 얘기는 아니었고 미래 얘기였지만 말이다. 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등장인물이 많고 세계관이 복잡한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웠다. 그 치밀한 플롯의 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선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후의 낮고 또렷한 목소리 사이로 선의 곤한 숨소리가 섞여 들어올 때 이야기는 조심스레 중단되었다.

결말까지 다 안 말했어도 선에게 후는 이미 밤의 수호자였다. 춥고 고단하고 칠흑같은 밤도 후가 들려주는 이야기 옆에서는 평안하게 잊혀져갔다. 아침이 되면 정확히 복기하기도 어려울 만큼 복잡한 이야기들을 후는 언제고 지어낼 수 있었다. 샤워할 때마다 생각해놓은 서사였다. 복잡할수록 선이 금세 곤히 잠들 것이므로 후는 마음껏 촘촘히 이야기를 짰다. 퇴근 후 온몸을 씻고 반질반질해진 얼굴로 맞이하는 자정은 후의 정신이 가장 명료한 시간이었다.

그런가하면 선은 아침에 또렷해졌다. 지체 없이 이불 밖으로 나와 집을 치우고 운동을 하고 일을 했다. 선의 하루는 후보다 일찍 시작되므로 배도 먼저 고파졌다. 아침의 업무를 모두 마친 선에게 남은 일이란 늦잠 중인 후를 살살 흔드는 것이었다. 몽롱한 후가 눈을 반쯤 뜨면 선은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젓가락처럼 펴고는 면발을 호로록 호로록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아침으로 쌀국수를 먹고 싶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서 먹는 시늉이란 유행처럼 번지는 놀이였다. 말없이 동작만으로 누가 누가 더 그럴싸하게 음식을 표현하나 선보였다. 대체로 더 배가 고픈 쪽은 선이었으나 음식을 더 잘 표현하는 쪽은 후였다. 후의 가짜로 땅콩 먹기 흉내는 매번 선을 웃겼다. 그가 허공으로 땅콩 몇 알을 던지고 입으로 죄다 받아먹는 척을 할 때만큼은 인생이라는 게 톰과 제리 애니메이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늦은 아침, 얼른 식당에 가고 싶은 선은 쌀국수 국물을 들이키는 시늉도 추가했다. 후루룩, 후루룩. 꿀꺽, 캬… 그러나 후는 이내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그에게 아침밥이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끼니였기 때문이다. 점심이나 저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후가 끼니를 제때 챙겨먹는 경우는 오직 RPG 속에서였는데 왜냐하면 이야기라는 걸 너무나 본격적으로 맞이하는 사람이라서였다. 그는 몹시 충실한 롤플레이어로서 게임에 임했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도 현실의 자아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게임의 서사를 짜고 세계를 구축해놓은 스토리텔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전사면 전사답게, 마법사면 마법사답게. 여행자면 여행자답게. 여행자의 신분일 경우 후는 게임 속 마을에 비가 내리면 꼭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빗줄기라는 그래픽이 캐릭터에게 아무런 불이익을 주지 않아도 그랬다. 또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동할 때 후는 캐릭터를 절대로 뛰게 하지 않았다. 뛴다고 캐릭터의 체력이 빨리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꼭 걸어가게 했다.

왜 그러는 거야? 선이 물어보면 후는

여행자가 왜 굳이 뛰겠어. 걸어가지. 라고 대답했다. 힐링포션으로 간단히 채울 수 있는 hp를 꼭 음식물로 채우기도 했다. 힐링포션만으로는 캐릭터의 다채로운 입맛을 충족시켜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후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몰입해서 게임하는 플레이어들을 가리키는 명칭이 따로 있다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

선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런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냐면… 바보라고 불러.

선과 후는 동시에 웃었다. 선은 게임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지어내지도 못했다. 그리고 후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상상하고 몰입하는 것만으로 금방이라도 땅에서 발을 살짝 띄워놓는 후를. 그런 공중부양으로 선에게 어떤 나른함을 선사하는 후를. 하지만 후는 선과 아침을 같이 먹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현실의 자신을 보양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기도 했다. 그동안 후의 이야기에 등장한 수십 명의 인물들 중에서도 아침을 챙겨먹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온갖 능력을 발휘하고 온갖 사건을 만나는 와중에도 아침만은 안 먹었다.

선은 혼자서 쌀국수 집으로 걸었다. 한 그릇을 주문했다. 가짜로 말고 진짜로 쌀국수를 먹었다. 아침밥은 선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료였다. 선의 일기에는 꼭 아침의 일들이 적혀있었다. 아침에 먹고 치우고 달리고 일해 놓은 것들이 선의 하루를 지탱하였다.

그 시간은 후가 가장 무력하고 무능한 때이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이 반복하는 낮의 일과들, 시시하다면 시시하고 초라하다면 초라한 그 일들을 후는 표정 없이 통과했다. 언젠가 선은 그 때의 후를 멀리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 저렇게 무력한 얼굴로 미래를 향해 가도 되는 것인가. 땅에 발붙인 시간에 저토록 낙이 없어도 괜찮은 것인가. 선의 마음에 걱정이 일 때쯤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날마다 틀림없이 반복되는 일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밤이 오면 후는 조금 지치고 더러워진 채였지만, ‘옛날옛날에’로 시작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다시 되어있기도 했다. 선은 또 미치게 좋았다. 후의 옆에 누워 웃음을 참으며, 나른하게 귓가를 맴도는 옛날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옛날이라는 건 너무 방대해서, 그리고 미래만큼이나 길어서, 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글 :

이슬아

(1992~)

연재 노동자, <일간 이슬아> 발행인

@sullalee


그림 :

ATOPI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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