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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칼럼] 탄생과 거짓말


우리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달라지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본인에 관한 농담과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이다. 과장하고 축소하고 생략하고 점프하고 덧붙이며 스스로를 위한 진실을 세공한다.


2015년의 어느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아는 탄생 설화 중 몇 가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한라산에 걸터앉아 제주도를 창조한 설문대 할망과, 알껍데기를 깨고 태어난 주몽과, 갈라진 제우스의 머리에서 황금 무장을 한 채 등장한 아테나의 이야기 따위를 손발 휘저으며 설명했다.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심드렁하게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나는 칠판에 ‘나의 탄생 설화’라고 적었다. 내가 그들에게 묻고 싶었던 건 각자의 기원(起源)에 관한 해석이었다, 자기 몸과 영혼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어떻게 믿고 싶은지 궁금했다. 낳아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 세상에 왜 태어난 것이며, 혹시 그 의미를 찾았는지도 궁금했다.


칠판에 적힌 글감을 보고 열 살 조이한은 글 한 편을 휘리릭 완성했다. 제목은 ‘조이한의 탄생 신화’. 전문은 이렇다.


‘난 하늘에 있었다. 내 앞에는 부처님과 하느님과 오방신, 저승사자, 예수님, 할락궁이, 터주신, 제우스, 알라신, 자연신 등 여러 신이 있었다. 난 신들한테 말했다. “저기요.” 그러자 신들이 내게 말했다. “가라.” “어디로요?” “너희 엄마 뱃속으로.” 갑자기 문이 내 앞에 생겨났다. 들어가자 우리 엄마 뱃속이었다. 신들이 말했다. “이제 너의 수명은 예전과 다르다.” 그 순간 내가 태어났다. 태어나자 우리 엄마가 보였다. 좋아서 “응애 응애” 하고 울었다.’


원고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이 글을 열 살의 조이한과 킥킥대며 읽었다. 본인에 관해 마음에 드는 루머 하나를 막 창조한 그는 무엇이든 쓸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또 다른 버전의 탄생 신화도 한 편 더 써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엄마와 아빠를 인터뷰한 뒤 완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다음 주에 조이한은 이런 글을 써왔다.


‘옛날에 엄마랑 아빠는 63빌딩에서 커피를 마셨다. 엄마가 전해준 말이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엄마가 아빠에게 “너 시간 있니?”라고 물었다. 아빠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 그러자 아빠의 영혼이 찬물에 적셔진 것처럼 놀랐다.’


나는 이 대목에서 깜짝 놀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혼에 대한 느낌을 아빠께서 이렇게나 멋지게 설명해주신 거냐고. 조이한은 딴 데를 보며 “그냥 제가 상상한 다음에 써봤어요”라고 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해 쓰다가 그는 얼떨결에 자기 아닌 다른 존재로 잠시 확장되었던 것이다. 아까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시간이 지나고 둘은 쇼핑, 싸움, 사랑 등등을 하게 됐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될까?” 내가 묻자 조이한은 “이제 끝났죠?”라고 묻더니 부리나케 놀러 나갔다. 원고지랑 연필도 안 챙기고 뛰쳐나갔다. 나는 책상에 혼자 남아 그가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었다. 제목은 ‘거짓말’이었다.


‘언젠가 방귀를 뀌었는데 안 뀌었다고 거짓말했다. 엄마가 잘 해줬는데 잘 안 해줬다고 거짓말했다. 거짓말 안 했다고 거짓말했다. 그밖에도 이상한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아빠한테도 있고 엄마한테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모두한테 있다. 그러니까 모두 쓰는 말이라는 거다.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이한은 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학생이었지만 나는 글쓰기 교사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거짓말을 수호하는 과목은 글쓰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저 각자 몫의 삶만 산다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프 캠벨은 말했다.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죄다 이해하기가 벅차서 허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좋은 거짓말에는 빛도 어둠도 풍부하게 담겨있다. 그와 함께 지어낸 거짓말로 진실 쪽을 가리키고 싶었다.


2019년 3월 12일 화요일 경향신문


글 :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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