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경향신문 칼럼]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


글을 다 쓰고 나면 처음부터 훑어보며 접속사를 최대한 지우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래서’ ‘그리고’ ‘따라서’와 같은 말들을 최대한 덜어낸다.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뉘앙스를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문장의 관계를 섣불리 확정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나는 그 사이의 접속사를 뺀다. 두 문장들의 상호작용을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지만 어떤 행간은 비워둘수록 더욱 정확해진다. 특히 ‘그러나’와 ‘하지만’처럼 앞에 오는 내용을 역접(逆接)하는 접속사를 남발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문장이 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서로의 어깨를 안마해주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컵라면 한 개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이 경우 나는 ‘그러나’를 빼는 방향으로 문장을 수정한다. 앞문장과 뒷문장의 내용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상대방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은 마음과 내 몫의 라면을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은 공존할 수 있다. 인간은 양가적이고 복잡한 존재다. 모두들 여러 갈래로 동시에 뻗어나가는 욕망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중일 것이다. 나는 아까의 문장을 이렇게 고친다.


“아침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안마해주었고 저녁엔 컵라면 한 개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앞과 뒤가 그다지 모순적인 내용으로 읽히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접속사가 사라지자 양쪽 다 그럴 법한 일로 읽힌다. 문장 속의 두 사람은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무쌍하게 지내는 이들로 보인다.


접속사가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없는 노래가 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이야기>에 흐르는 노래다. 주연 배우 애덤 드라이버가 극중에서 이혼이 확정된 뒤 취한 채로 그 노래를 부른다. 가사의 일부를 옮겨 적어본다.


“Somebody hold me too close(날 너무 꼭 안는 사람)

Somebody hurt me too deep(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

Somebody sit in my chair and ruin my sleep(내 자리를 뺏고 단잠을 방해하고)

And make me aware of being alive(살아간다는 걸 알아차리게 하는 사람)

Being alive(살아가는 것)


Somebody need me too much(날 너무 필요로 하는 사람)

Somebody know me too well(날 너무 잘 아는 사람)

Somebody pull me up short(충격으로 날 마비시키고)

And put me through hell(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

And give me support for being alive(그리고 살아가도록 날 도와주지)

Make me alive(날 살아가게 해)

Make me confused(날 헷갈리게 해)

Mock me with praise(찬사로 날 가지고 놀고)

Let me be used(날 이용하지)

Vary my days(내 삶을 변화시켜)


(…) Somebody crowd me with love(넘치는 사랑을 주는 사람)

Somebody force me to care(관심을 요구하는 사람)

Somebody make me come through(내가 이겨나가게 해주는 사람).”


서로 충돌하는 듯한 문장들이 마구 섞여있다. 누군가는 같은 내용을 아래와 같이 말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은 날 너무 잘 알고 넘치는 사랑을 준다. 하지만 때로는 깊은 상처를 남기며 날 지옥에 던져놓는다.”


이 노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천국과 지옥을 예기치 못하게 넘나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를 살아가게도 하고 헷갈리게도 하며, 날 가지고 노는 동시에 내가 이겨나가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성립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는 사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심지어 충돌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복합성이라고 느낀다. 이 동시다발적인 복잡함에 대해 말하는 게 문학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예술들은 모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그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2019.12.16. 경향신문

글 : 이슬아



조회수 4,161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날의 옷차림까지 외우고 있는가. 이 주제로 모은 수십 편의 글 중에서 너무 서투른 옷차림이라

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것인지 맞혀보자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번에 글의 주인을 찾아냈다. 같은 종이에 동일한 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