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경향신문 칼럼] 음식과 글쓰기


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학생들이 다음 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얼떨결에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될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


한편 간접적인 영향을 준 목소리도 있다. 나의 엄마 복희씨의 목소리다. 그는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 이들에게 밥을 차렸다. 그러느라 고단했던 날도 잦았겠지만 나는 복희씨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다고 느낀다. 부엌일을 즐겁게 치르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복희씨는 그 일이 자신의 재능 중 하나임을 몸으로 안다. 다른 사람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든다. 그야말로 ‘뚝딱’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속도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가사는 늘 틀리지만 손놀림은 틀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생생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하고 싶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얘는 꼭 싱싱한 무로 방금 무쳐놓은 깍두기 같네.”

“걔는 별다른 고명을 올리지 않은 국수 같아. 밍밍한 듯해도 깔끔하고, 과한 구석이 없어.”

“쟤는 낯선 향신료를 섞은 커리 같아. 처음엔 궁금했는데 맛보고 나니까 확 질려서 또 먹고 싶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직관적으로 확 이해하게 된다. 복희씨가 설명하는 인물의 기질과 속성을 말이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꼭 복희씨가 했을 법한 말을 무심코 내 입으로 한다. 어떤 아이가 써온 글의 분량이 너무 적고 내용이 부실할 경우 나는 ‘장을 너무 조금 봐온 글 같다’고 말한다. 다음주에는 재료를 더 풍성하게 구한 뒤에 써보자는 말도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이는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소재로 글을 써왔는데 비문과 오타가 많고 문장이 어수선하며 일부 문단은 완성이 덜 돼있다. 그럼 이렇게 피드백한다.


“특별한 재료들을 갖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쳐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접시에 엉망으로 옮겨 담은 글 같아. 먹다보니 덜 익은 부분이 있는 음식처럼 읽히기도 해. 다음엔 조금 더 일찍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마지막까지 성의 있게 다듬을 시간이 있도록 말이야. 이 글감이 품은 특별함을 다 살리지 못해 아쉬워.”

그 말을 내뱉는 즉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내가 시급히 고쳐야할 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소재로도 맛깔 나는 글을 완성하는 아이도 있다. 다들 겪을 법한 흔한 일인데 그 애의 손을 거치면 어쩐지 더 재밌고 만족스러운 글이 된다. 나의 글쓰기 스승은 그런 글을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곤 했다. 글은 사실 머리도 가슴도 아닌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쓰기를 반복적으로 훈련한 손만이 안정적이고 탄탄한 문장을 써낸다고. 그건 마치 음식을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몇 가지 핵심적 양념쯤은 손쉽게 만드는 사람의 손과도 같다. 그런 이는 순두부찌개나 비빔밥이나 콩나물국처럼 특별할 것 없는 메뉴로도 늘 평타 이상의 맛을 낸다. 한편 어떤 아이는 쓰다 만 글을 들고 오기도 한다.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수습을 못한 것이다. 깜냥이 되지 않는 재료를 손댔는데 칼질 도중 어찌 해보지 못하고 도마 그대로 들고 온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런 글에서는 독자를 부담스럽게 만들 비린내가 난다. 


글쓰기에 임할 때 나는 복희씨로부터 보고 배운 부엌의 감각을 되살리곤 한다. 모든 글을 음식에 비유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고 익혀서 포만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요리는 닮아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며 나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배운다. 이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밥 혹은 언어와 무관한 삶은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19.11.28. 경향신문

글 : 이슬아




조회 472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경향신문 칼럼] 그날 입은 옷

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날의 옷차림까지 외우고 있는가. 이 주제로 모은 수십 편의 글 중에서 너무 서투른 옷차림이라

[경향신문 칼럼] 글투의 발견

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것인지 맞혀보자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번에 글의 주인을 찾아냈다. 같은 종이에 동일한 폰

[경향신문 칼럼] 먼저 울거나 웃지 않고 말하기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한국판 띠지에는 김애란 작가의 짧은 추천사가 이렇게 적혀 있다. “울지 않고 울음에 대해 말하는 법.” 이 한 문장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샀다. 나 역시 울지 않고 슬픔에 대해 잘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펼쳐들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데니즈라는 인물이 등장

©이슬아

sullal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