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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칼럼] 소년의 마음으로 쓰는 소년의 글



박민규 작가가 말하길, 좋은 글은 두 가지로 나뉜댔다. 노인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 혹은 소년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 이건 투명한 밤하늘만큼이나 명료한 기준이며 그 나머지에겐 모두 아차상을 주겠노라고 그는 썼다.


나의 학생들이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을 종종 본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챌 수 있다. 어떤 얘기를 하려다 말 때. 말 못할 이유로 당장의 솔직함을 포기할 때. 남 탓만 할 수 없을 때. 가장 원망스러운 건 자기 자신일 때. 아이들은 복잡한 마음으로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고친다. 그렇게 쓴 것들은 아주 조금 노인의 문장처럼 보인다.


어느 날은 한 아이가 글을 완성해놓고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 원고지에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그저 다음주에 쓴 이야기는 내게 보여주고 싶어지기를, 안심해도 되는 독자로 나를 생각해주기를 바라며 애쓸 뿐이다. 10대들 앞에 글쓰기 교사로 서는 건 마음 놓아도 되는 어른이 되는 연습 같다. 아이들이 비밀과 죄책감을 쌓으며 어른이 되어갈 때 정서적으로 비빌 언덕 중 하나일 수 있도록 말이다.


<소년의 마음>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여느 소년들처럼 그 책 속의 소년도 슬픔과 그리움을 겪으며 자라난다. 그는 엄마가 아빠와 싸운 뒤 만드는 카레의 맛을 안다. 그 카레는 맛이 없다. 미움이 들어가서 그렇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또한 소년은 죽음이 두렵다. 엄마와 아빠가 죽을까봐, 누나들이 죽을까봐, 자기가 죽을까봐 두렵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막 눈물이 난다. 소년은 울면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어차피 다 죽는데… 나를 왜 낳았어?”


비슷하지만 다른 질문을 하는 노래도 있다. 뮤지션 신승은이 쓰고 부른 ‘쇳덩이’라는 노래다. 노래는 부모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나 같은 사람을 도대체 왜 낳은 거냐고. 아이가 이런 세상에 왜 나를 태어나게 했냐고 물었다면, 어른은 이런 나를 왜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고 묻는다. 쇳덩이의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적어본다.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아/ 영화 속에서 본 것 같은 쇳덩이가/ 왜 나의 가슴팍 위에 자리 잡고 있는지/ 숨을 왜 잘 못 쉬고 있니/ 네가 물었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쇳덩이가/ 왜 너의 가슴팍 위에도 자리 잡고 있는지/ 다른 색깔 다른 모양 다른 무게의 쇳덩이/ 서로가 들어줄 수 없는 딱 그 모양의 쇳덩이/ 왜 태어난 건지 모르겠어/ 엄마 아빤 서로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도대체 왜 낳은 건지/ 어쩌면 거기서부터 난 잘못되어 있는 건지/ 다른 색깔 다른 모양 다른 무게의 쇳덩이/ 포옹을 할 때마다 귀를 닫고서 했었지/ 사랑을 잘해보고 싶어/ 깨끗하고 행복한 사랑/ 애초에 내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누가 나서서 말해준다면/ 오늘부로 깨끗이 포기할 텐데/ 너의 뒤통수를 만지는 일도/ 함께 아침을 차려 먹는 일도/ 논쟁을 하다 와락 껴안는 일도/ 어쩌면 나의 상상 속의 행복 속의/ 상상 속의 행복 속의 상상 속의/ 행복이었다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포옹을 꼭 해보고 싶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이 노래가 흘러나와 나는 눈물을 훔치며 길을 건넜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포옹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가슴팍 위 쇳덩이를 솔직히 말해보려던 참에 상대방의 가슴팍 위 쇳덩이도 보여 입을 다물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건 어른이 되는 감각 같았다. 내 것 아닌 쇳덩이의 색깔과 모양과 무게도 곧바로 알아보는 안목. 서로 들어줄 수 없음을 알고 귀를 닫은 채 하는 포옹.


이 가사는 노인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일까. 혹은 소년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일까. 아니라면 노인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일까. 잘 모르겠다.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이 아니라는 것만 알겠다. 그래서 아이들이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을 벗어나려고 할 때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된다. ‘아마도 너는 이제부터 더 깊고 좋은 글을 쓸 거야. 하지만 마음 아플 일이 더 많아질 거야. 더 많은 게 보이니까.’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갈 만한 삶이라고, 태어나서 좋은 세상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세상의 일부인 교사가 되고 싶다.


2019.07.30.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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