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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칼럼] 먼저 울거나 웃지 않고 말하기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한국판 띠지에는 김애란 작가의 짧은 추천사가 이렇게 적혀 있다. 

“울지 않고 울음에 대해 말하는 법.” 

이 한 문장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샀다. 나 역시 울지 않고 슬픔에 대해 잘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펼쳐들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데니즈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데니즈의 상사이자 다정한 친구인 헨리의 목소리로 이렇게 서술한다.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데니즈가 슬펐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웠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데니즈의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봄의 장면을 선명히 그려볼 수 있다. 그 아름다움에 상처를 입을 만큼 취약해진 마음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제일 소중한 사람이 옆에 없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실감나서 날마다 새롭게 아플 것 같다.


이 상상은 나의 몫이다. 내가 슬플 공간을 작가가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데니즈가 슬프다는 핵심 요약 문장을 간단하게 쓰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더라도 작가가 먼저 울어서는 안된다고 나의 글쓰기 스승은 말하곤 했다. 그럼 독자는 울지 않게 될 테니까. 작가가 섣부른 호들갑을 떨수록 독자는 팔짱을 끼게 될 테니까.


울지 않고 슬픔을 말하듯 웃지 않고 재미에 대해서도 잘 말하고 싶었다. 탁월한 코미디언은 결코 자기 농담에 먼저 웃지 않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재밌는 이야기도 웃음기 없이 끝까지 들려준다. 관객들은 이미 배꼽 빠지게 웃고 있다. 


얼마 전 그런 공연을 실제로 보았다. 동북아시아구술문화연구원(이하 ‘동북구원’)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었다. 코미디를 보기만 하고 한 번도 직접 해보지는 않은 여섯 명이 퇴근 후 모여서 몇 주간 준비한 데뷔무대였다. 그들은 실력에 영 자신이 없어서 돈도 받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각자 10분씩 썰을 풀기 시작했는데 나는 한 시간 내내 너무 많이 웃다가 거의 탈진을 할 뻔했다. 후반부에는 광대가 욱신거려서 주무르며 웃어야 했다. 


이상한 점은 그것이었다. 그들이 들려준 얘기들이 모두 조금씩 비극적이라는 점 말이다. 울면서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연들이었다. 사기와 성추행과 폭력과 부조리와 노화와 수치로 가득한 서사였다. 그들은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은 채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객들은 안타까움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슬픔을 훌쩍 넘어서는 유머 때문이었다.


나는 동북구원의 여섯 명이 그 얘기를 얼마나 여러 번 다시 말해보았는지를 가늠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입 밖에 꺼내는 슬픈 이야기는 곧바로 유머가 되기 어렵다. 여러 번 말해보고 자꾸 다르게 말해볼수록 그 사건이 품은 슬픔의 농도가 옅어진다. 슬픔 속의 우스꽝스러움도 발견하게 된다. 반복적인 글쓰기의 자기 치유 과정과도 닮아 있다. 나는 치유를 위해 글을 쓰지 않지만 글쓰기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스스로를 멀리서 보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그 연습을 계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기거나 지나치게 어여삐 여기지 않는 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기 연민의 늪과 자기애의 늪 중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완성하여 독자와 관객에게 슬픔과 재미를 준다.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준다. 자신 말고 타인이 울고 웃을 자리를 남긴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야기로 초대하는 예술이다. 더 잘 초대하기 위해, 더 잘 연결되기 위해 작가들은 자기 이야기를 여러 번 다르게 말해보고 써본다. 먼저 울거나 웃지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2019.12.30. 경향신문

글 :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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