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서평] 해가 지는 곳으로 - 최진영
최종 수정일: 2019년 3월 13일

해질 무렵에 이 책을 사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걸으면서 읽고 앉아서 읽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가며 읽었다. 다음 문장이 이전 문장에 자석처럼 따라붙어서 멈춰지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이라곤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나. 나는 이 소설에 완전히 설득되었다.
세계가 망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출발은 전 세계적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의 떼죽음 때문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세계를 진짜로 망치는 건 살아남은 자들이다. 온 대륙에 창궐한 바이러스보다 끔찍한 기질 또한 인간 안에 있으므로 또 다른 재앙을 서로의 얼굴에서 확인하기도 한다.
모든 게 엉망이 된 와중에도 어떤 이들의 얼굴은 찬란하다.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라고, 절대 이 재앙을 닮아가진 않을 거라고,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옆에는 바로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세계는 망해가고 있으며 그들은 만났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를 만나고 싶었다. 강도와 살인과 폭력과 강간이 범람하는 와중에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각박한 세상의 끝까지 같이 걸어갈 수도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세수를 할 때 사랑하는 애가 내 앞에 왔다. 걔는 놀라며 내 얼굴을 만졌다. 그 애랑 이 소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상상을 하면 그저 두려워졌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을 가장 먼저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소설 속 그들처럼 끝까지 강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나 강해질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2018.12.27)
글 :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