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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인쇄기 앞에서



일러스트 손은경 @thanksforbeingu


두 권의 책을 만들며 가을을 보냈다. 그동안 내 글과 그림은 디지털 데이터로만 존재했는데 이제 드디어 물성을 가지는 것이다. 데뷔한 지 5년 만에 책 제목과 함께 나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권은 출판사와 함께 만들었다. 예전에 그린 모녀 만화를 글과 함께 엮은 책이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한 권은 내가 직접 독립 출판한 책이다. 지난 반년간 이메일로만 연재한 <일간 이슬아>의 글들을 묶어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여하고 책임지는 독립 출판이었으므로 이 과정을 조금 말해보고 싶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제작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한 달 전 제작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한 일은 교정 교열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나에겐 6개월간 매일 쓴 글 뭉텅이가 있었다. 이 많은 양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보고 오탈자를 찾고 윤문을 도와줄 전문가를 고용하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아주 많은 문제를 교정 교열자가 찾아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충청북도 옥천에서 포도밭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최진규 선생님께 내 책의 교정 교열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나는 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으나 그분이 만든 책을 몇 권 알고 있었다. 15년간 출판계에서 일해온 최 선생님은 <일간 이슬아>의 구독자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이슬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일했다. 최 선생님께 작업비를 보내드리고 원고지 매수로 2,000매에 가까운 글 뭉텅이를 전송했다. 이후 3주간 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여러 번 원고 파일이 오갔다. 그가 어떤 문장에 어떤 표시를 해놓았는지 유심히 보았다. 이 단어 말고 또 어떤 단어로 고칠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최 선생님은 늘 최종 선택권이 나에게 있음을 상기해주었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내 문장을 다듬는 분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읽고 다듬고 책을 만들어온 편집자에게 내 문장을 수정 받는 동안 즐거웠다. 그와 함께 다시 써본 문장이 훨씬 좋은 문장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덜어내도 좋을 습관과 군더더기를 깨달을 때마다 속이 시원했다. 문장을 쓸 때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실수들을 몇 가지 기억했다. 창피하지만 재미있는 배움이었다. 교정교열이라는 일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최 선생님이 교정을 보며 본문을 다듬는 동안 나는 책을 감싸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표지를 만들었다. 동료 작가인 이다울과 류한경이 표지 사진과 프로필 사진을 촬영해주었다. 한편 나는 외부 원고를 청탁하기도 했다. 책 후반부에 추천사와 작가론을 싣기 위해서였다. 요조, 이랑을 비롯한 동료 창작자들이 <일간 이슬아>와 이슬아에 관한 각자의 해석을 적어주었다. 그들이 덧붙인 글과 만화 덕분에 이 책의 후반부가 든든해졌다. 수필을 읽는 방식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글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원고료를 송금했다.


백 편에 가까운 내 글과 동료 작가들의 헌사까지 모으자 이 책의 분량은 500쪽이 훌쩍 넘었다. 최 선생님과 여러 가지를 상의했다. 본문과 표지 종이의 재질, 인쇄 방식, 표지의 타이포그래피, 주요 색감, 가격과 유통 방법 등 결정할 내용이 많았다. 편집자이자 교정 교열자인 최 선생님께 물어볼 것투성이였다. 그가 옥천에서 교정지를 들고 서울에 오실 때마다 내가 질문하고 그가 대답하느라 한나절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책을 완성하긴 했겠지만 그랬다면 훨씬 더 많은 품이 들었을 것이다.


10월 첫 주에는 최 선생님과 함께 경기 파주에 갔다. 완성된 책의 데이터 파일이 본격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에 표지 감리를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 가본 출판단지의 인쇄소에서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인쇄기가 무지막지하게 웅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기계에서 내 책이 아주 빨리 아주 많이 인쇄되는 걸 보고 무서움을 느꼈다. 출판이라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물성을 가진 책에 내가 쓴 글이 인쇄되는 이상 이 물건은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책임이었다.


거대한 인쇄기 앞에서 내가 무엇을 썼는지 다시 기억했다. 본문 안에 있는 타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슬이가 글쓰기로 죄를 짓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하지만 과슬이는 미슬이만큼이나 못 미더운 구석이 많았다. 이 가을에 만든 수필집이 누구에게 어떻게 읽힐지, 과슬이도 현슬이도 미슬이도 아직 아는 바가 없었다. 진한 잉크 냄새로 가득한 인쇄 공장에서 나와 최 선생님이랑 담배를 피웠다. 하늘에 철새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2018.10)


월간 <채널예스> 2018년 11월호


글 : 이슬아

그림 : 손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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