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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있던 곳들




마음에 불순물이 낀 밤이면 김을 생각한다. 김은 나의 오래된 친구지만 얼굴을 본지는 오래되었다. 요즘 어디서 지내려나. 걔는 일 년에도 몇 번씩 거처를 옮기니까 종잡을 수가 없다. 경상도에도 전라도에도 제주도에도 경기도에도 서울에도 머물 곳이 있댔는데 지금은 어디에 짐을 풀었을지 궁금하다. 머리가 얼마나 자랐을지도 궁금하고 요즘 어떤 옷들을 입고 다니는지도 궁금하고 탱탱한 가슴이 여전한지 아닌지도 궁금하다.


몇 년 전 뉴스를 보다가 경주의 지진 소식을 들었다. 작은 지진이랬다. 그 무렵 김이 경주 근처에서 지낸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걔네 집은 괜찮으려나. 걱정이 되었지만 다음 뉴스의 내용이 더 충격적이어서 지진과 김을 금세 까먹고 말았다. 물론 지금은 그 다음 뉴스의 내용마저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러고서 이튿날 아침 청소기를 돌리던 중 머릿속에 퍼뜩 지진과 김이 다시 떠오른 게 아닌가. 나는 오랜만에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왜.

괜찮아?

뭐가?

어제 너 있는 곳에 지진 났다며.

진짜?

뉴스에서 그러던데. 몰랐어?

몰랐네.

어젯밤에 났다고 하더라고.

그래? 나 섹스 하느라 몰랐나봐.

그랬구나.

그랬지.

그래. 알겠어.

응.


전화를 끊고서 지진 같은 섹스를 상상했다. 섹스를 어떻게 해야 지진이 난 것도 모를 수 있을까. 지진에 버금가는, 혹은 지진보다 더한 섹스가 내 인생에 있었던가. 아니면 김이 그저 방진 설계가 잘 된 집에 살고 있는 건가. 몇 마디 안 나눈 통화였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김, 너는 잘 지내고 있구나! 청소기를 마저 돌리며 김의 하루를 짐작해보았다. 예의 그 허리를 곧게 펴고 입술을 단호하게 다문 채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를. 그러고 보니 걔는 불편한 회식 자리에서도 싫은 짓은 안 한댔는데. 남자 상사의 빈 잔을 채워주거나 쥐포를 뜯어서 건네는 일들 말이다. 나라면 분위기상 괜히 했을 법한 짓들을 김은 딱 거절하고는 태연한 얼굴로 딴 얘기를 시작했다.


중학생 때는 김과 내가 비슷하게 용감한 줄 알았다. 위험한 짓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걔랑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경춘로를 달렸다. 차가 쌩쌩 다니는 고속 도로였다. 제대로 된 인도가 없는데도 굳이 그 길로 갔다. 자동차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 옆을 스쳐 지났다. 주행 중인 자동차가 그렇게나 시끄러운지 그 날 처음 알았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차도 바로 옆길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지는 않을 텐데. 우리는 어쩐지 아주 크게 웃으며 그 길을 달렸다.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너무 많이 웃어서 몸속이 텅 빈 것 같을 때까지 웃었다. 하지만 터널을 지날 때만큼은 웃음기가 싹 가셨다. 몇 배나 커진 자동차 소리가 터널 안을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터널은 어둠과 먼지와 소음으로 꽉 찬 장소였다. 보행자가 다니라고 지어진 곳이 아니었다. 아찔한 속도로 달리는 차들이 등 뒤에서 다가오고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입과 귀를 틀어막고 최대한 빨리 인라인 스케이트를 굴렸다. 동그랗고 밝은 출구를 향해서 냅다 뛰었다.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김과 나는 안도의 팔짱을 꼈다. 우리 사이에 비슷한 공포가 지나갔음을 말 안 해도 알았다. 그 이후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안 탔다. 대신 오토바이를 탔다.


고등학생 때 하루는 오토바이를 몰고 걔네 집에 갔다. 시동을 끄고 마당에 주차를 하면 김의 가족이 십 년 가까이 키워온 작은 개가 현관 앞에서 몸을 흔들었다. 거실에서부터 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김의 냄새는 곧 걔네 집의 냄새였다. 따뜻하면서도 구리면서도 달큰하면서도 이상한 냄새. 김의 방에서 가장 확실하게 났다. 김은 이불을 덮고 천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천장에 소형 텔레비전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걔네 아빠가 설치해준 것이랬다. 그러한 편리와 쾌락의 모양은 참으로 김과 어울렸다. 나도 이불속에 들어가 걔 몸을 껴안고 나른하게 텔레비전을 봤다. 이 집에서 온통 네 냄새가 난다고 내가 말하자, 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야, 너 온 다음부터 네 냄새야말로 완전 많이 나거든?

내 냄새가 뭔데?

너희 집 나무 냄새랑 네 살 냄새랑 김치찌개 냄새.


김의 후각은 나보다도 훨씬 뛰어나서 내 몸에 묻은 냄새만으로도 뭘 먹고 왔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명탐정에게 범죄를 들키는 기분이었으나 같은 곳에서 놀다보면 어느새 서로의 냄새를 감지하기가 어려워지곤 했다. 코는 금방 둔해지는 부위니까. 십대 내내 붙어 있느라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각자가 가진 진한 체취를 까먹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일 년에 한 번씩 김을 만났다. 바쁘게 지내다가 여름이 오면 수영복을 챙겨 함께 바다에 갔다. 오랜만에 만나면 새삼 서로의 냄새를 확실하게 맡을 수 있었다. 싸구려 모텔에 둘의 짐을 풀고 물놀이를 하러 나갔다. 다이빙하고 헤엄치고 물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둥둥 뜬 채로 한낮을 보내다가 모래 위에 누워 몸을 그을렸다. 얼굴에 모자를 덮은 채로 밀린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김과는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앉거나 누워서 말하는 게 더 좋았다. 김의 집과 일터와 애인은 늘 나보다 자주 바뀌었다. 내가 같은 자리에서 익숙한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반면 김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볍게 움직이며 일과 관계를 확장하며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쨍한 햇볕 아래에서 우리의 몸이 익어갔다.


그나저나 어느새 여름 친구가 되었네.

맞아. 옛날에는 사계절 친구였는데.


해가 지면 까무잡잡해진 몸으로 숙소에 들어와 같이 욕조에 들어갔다. 좁은 욕조를 반씩 차지한 채로 머리를 감고 담배를 피웠다. 김과 나는 매년 서로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챘다. 제주 애월읍의 모기장 안에서도, 상주 민박집의 공동욕실에서도, 강원도 양양의 캠핑카 안에서도 그런 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을 놀다 헤어지면 반 년 넘게 연락하지 않아도 좋았다. 가끔 보고 싶지만 그냥 그립도록 놔뒀다.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두고 싶었다. 매일의 너절한 마음들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어느새 까먹어버린 뒤, 다시 김을 만나면 정말로 중요하고 재밌고 슬픈 이야기들만 꺼내고 싶었다.


오늘도 청소기를 돌리며 오랜만에 김을 생각했다. 같이 갔던 장소들이 많아서 걔가 어디에 있대도 그 모습을 금방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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