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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칼럼] 그날 입은 옷

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경향신문 칼럼] 글투의 발견

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경향신문 칼럼] 먼저 울거나 웃지 않고 말하기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한국판 띠지에는 김애란 작가의 짧은 추천사가 이렇게 적혀 있다. “울지 않고 울음에 대해 말하는 법.” 이 한 문장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샀다. 나 역시 울지 않고 슬픔에...

[경향신문 칼럼]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

글을 다 쓰고 나면 처음부터 훑어보며 접속사를 최대한 지우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래서’ ‘그리고’ ‘따라서’와 같은 말들을 최대한 덜어낸다.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뉘앙스를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문장의 관계를 섣불리 확정하고...

[경향신문 칼럼] 음식과 글쓰기

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경향신문 칼럼] 그리움과 디테일

우리는 그리움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시도다. 그런 글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대부분 대체 불가능하다. 쉽게 대체 가능하다면 그리움에 마음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경향신문 칼럼] 반복되는 살처분, 더 나은 반응을 하자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나로 인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비건 지향 생활을 지속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지구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경향신문 칼럼] 쓰레기의 시간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 손에서는 그랬다. 나는 쓰레기를 잠깐씩만 만져왔으므로. 더구나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으므로. 쓰레기란 내가 원하는 물질을 깨끗하게 감싸던 것. 손과 물건 사이의 얇고...

[경향신문 칼럼] 소년의 마음으로 쓰는 소년의 글

박민규 작가가 말하길, 좋은 글은 두 가지로 나뉜댔다. 노인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 혹은 소년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 이건 투명한 밤하늘만큼이나 명료한 기준이며 그 나머지에겐 모두 아차상을 주겠노라고 그는 썼다. 나의 학생들이 소년의...

[Axt 서평] 삼촌과 페소아

나의 소설 쓰기는 인물 작명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실제로 보거나 듣거나 만지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을 주어로 쓰는 건 두렵고 어색하다. 그런 주어로 문장을 시작하면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마침표를 잘 못 찍겠다. 독자는 바로 알아챌 것이다. 내가...

[경향신문 칼럼] 문제 해결의 경험치

나의 학생들은 문제를 마주했던 순간에 대해 글로써 증언하곤 한다. 열 살 김지온은 이렇게 썼다. “5년 전 일이다. 침대 위에 앉아서 휴대폰에 딸린 조그마한 장식용 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야광 하트가 좋아서 조금씩 입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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